'골잡이가 골키퍼 훈련도...' 故 뮐러의 위대한 직업정신 [이종성의 스포츠 문화&산업]

이종성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  |  2021.08.20 12:13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서독 대표팀의 게르트 뮐러(오른쪽)가 호주와 경기에서 헤더 골을 넣고 있다. /AFPBBNews=뉴스1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서독 대표팀의 게르트 뮐러(오른쪽)가 호주와 경기에서 헤더 골을 넣고 있다. /AFPBBNews=뉴스1
21세기 축구에서 정통 스트라이커의 숫자는 줄어들었다. 최전방 공격수는 골만 넣으면 되는 게 아니라 상대 공격을 차단하거나 그 속도를 지연시키는 1차 수비라인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격수로서 탈압박을 잘 하는 능력뿐 아니라 수비수로서 압박도 잘 해야 살아 남을 수 있다.


더욱이 최근에는 최전방 스트라이커라 하더라도 중원에서 공을 많이 받아내야 한다. 페널티 박스 부근에서 '섬'처럼 고립된 스트라이커는 전술적 측면에서 효용가치가 크지 않다.

지난 15일(한국시간) 별세한 독일의 전설적 스트라이커 게르트 뮐러(1945~2021)는 21세기 관점으로 보면 수비수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골잡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페널티 박스에서 골을 넣는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그의 기념비적인 득점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바이에른 뮌헨을 분데스리가의 최고 명문팀으로 이끌었던 뮐러는 리그 통산 득점이 365골로 역대 1위다. 월드컵에서도 통산 14골을 기록해 2006년 호나우두(44·브라질)가 이 기록을 갈아치울 때까지 32년간 역대 월드컵 득점왕의 자리를 차지했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그의 경기당 득점이다. 그는 분데스리가 427경기에서 365골을 기록했다. 경기당 득점이 무려 0.85다. 서독 국가대표로 뛰면서 달성한 기록은 상상을 초월했다. 62경기에서 68골로 경기당 득점은 1.09였다. 매 경기 한 골 이상을 넣은 셈이었다.

뮐러의 엄청난 기록은 모든 신체 부위로 골을 넣을 수 있는 능력 덕택이었다. 그는 발과 머리로만 득점하는 선수가 아니었다. 때로는 무릎으로 때로는 정강이로, 심지어 등으로도 골을 자주 넣었다.

고(故) 게르트 뮐러의 2009년 모습.  /AFPBBNews=뉴스1 고(故) 게르트 뮐러의 2009년 모습. /AFPBBNews=뉴스1
서독 축구 팬들은 엄청난 킬러 본능을 보여 준 그를 '작고 뚱뚱한 뮐러'로 불렀다. 서독 축구 선수로는 다소 작은 키와 통통한 체형 때문이었다. 호리호리한 장신선수들이 즐비한 서독 축구계에서 키 175㎝의 뮐러는 특이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럽 언론은 그를 '폭격기(Bomber)'로 불렀다. 2차 세계대전 때 동부전선에서 급강하 폭격기로 악명을 떨쳤던 슈투카(Stuka)를 그의 골 폭풍과 연결시켜 보도했기 때문이었다. 슈투카는 엄청난 굉음을 내며 교전국 전함과 주요시설을 폭파시켜 2차 대전을 겪은 유럽 지역에서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의 별명은 나치의 악령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적절치 않다는 논란도 많았다. 하지만 정확한 위치선정, 한 템포 빠른 슈팅과 국가대항전에서 더욱 빛을 발했던 가공할만한 득점력은 2차 대전의 상처를 기억하고 있는 유럽 기성세대들에게 슈투카 폭격기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이미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10골로 득점왕에 오른 뮐러는 4년 뒤 서독을 월드컵 정상으로 견인했다. 그의 축구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골은 자국에서 펼쳐진 1974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토털 사커' 네덜란드를 침몰시킨 결승골이었다.

'네덜란드가 전체 경기를 지배했지만 페널티 박스의 지배자는 뮐러였다'는 말이 나왔다. 축구에서 승자는 경기를 지배하는 팀이 아니라 골을 많이 넣은 팀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주는 골이기도 했다. 2차 대전 이후 오랜 기간 축구 경기에서 국기를 흔드는 행동을 꺼렸던 서독 관중들도 뮐러의 결승골이 터져 나왔을 때는 마음껏 국기를 흔들 수 있었다.

바이에른 뮌헨의 공격수 토마스 뮐러(오른쪽 2번째)가 지난 17일(현지시간) 도르트문트와 슈퍼컵 경기에 앞서 열린 게르트 뮐러 추모 행사에서 고인의 이름과 배번이 새겨진 유니폼을 들어보이고 있다.  /AFPBBNews=뉴스1 바이에른 뮌헨의 공격수 토마스 뮐러(오른쪽 2번째)가 지난 17일(현지시간) 도르트문트와 슈퍼컵 경기에 앞서 열린 게르트 뮐러 추모 행사에서 고인의 이름과 배번이 새겨진 유니폼을 들어보이고 있다. /AFPBBNews=뉴스1
흥미롭게도 뮐러는 1974년 월드컵 대표팀에 선발됐을 때 특별한 임무도 수행해야 했다. 그에게 맡겨진 임무는 비상대기 골키퍼 역할이었다. 그는 서독 골키퍼가 모두 부상 당하게 되면 뛸 수 있게 준비해야 했다. 물론 그 같은 최악의 상황은 오지 않았다.

하지만 뮐러는 팀을 위해 자신의 보조적 임무까지 성실하게 수행했다. 그는 대표팀 훈련 때마다 골키퍼로 변신해 충실히 연습을 했다. 얼마나 열심히 골키퍼 연습을 했으면 그는 동독과 월드컵 조별리그 경기를 앞두고 손가락 부상을 당해 제 컨디션이 아니었다. 그의 부상은 서독이 동독에 0-1로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될 정도였다.

뮐러는 1974년 월드컵 후 대표팀을 떠났다. 1979년에는 그의 축구인생을 바쳤던 친정팀 바이에른 뮌헨을 떠나 미국으로 향했다. 이어 미국에서 선수 은퇴한 후 스테이크 가게를 열어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사업은 축구처럼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고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 그는 선수 시절 동료들의 도움으로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 바이에른 뮌헨에서 유소년 팀 코치로 일했지만 불행하게도 알츠하이머병을 앓게 됐다.

뮐러가 위대한 축구 선수로 평가 받는 이유는 단순히 그의 골 기록 때문만은 아니다. 어쩌면 1974년 월드컵 때 주전 스트라이커였지만 혹시나 모를 비상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골키퍼 연습마저 충실하게 했던 그의 투철한 직업 정신은 독일 사회의 표상이었다. 직업을 신성한 의무라고 생각하는 근면한 마이스터(명장·名匠)의 나라 독일에서 그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다.

이종성 교수.  이종성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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