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커송' 구장처럼 사라지면 안되는 한국야구 올림픽 신화 [이종성의 스포츠 문화&산업]

이종성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  |  2021.08.06 16:18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뒤 시상대에 오르는 한국 야구 대표팀 선수들.  /사진=뉴시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뒤 시상대에 오르는 한국 야구 대표팀 선수들. /사진=뉴시스
몇 년 전 중국 베이징에 갔을 때 우커송 야구장이 있던 곳을 우연히 들른 적이 있었다. 2008년 베이징 하계 올림픽에서 한국 야구가 전승 우승을 차지했던 장소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하지만 올림픽 야구장의 흔적은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임시 경기장으로 건립됐던 우커송 야구장 부지는 올림픽 이후 쇼핑몰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쉬움은 남았지만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이미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 펼쳐지기 3년 전 야구는 정식종목에서 퇴출된 상태여서 2012년 런던 대회부터는 올림픽에서 볼 수 없게 됐었다. 야구 문화가 형성되지 않은 중국에서 굳이 올림픽 때문에 야구장을 신축해 계속 운영할 필요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던 셈이다. 새삼 야구는 글로벌 스포츠가 아니라 특정 지역에서만 열광하는 로컬 스포츠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국 야구 역사에서 2008년은 큰 변곡점이었다. 이미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4강에 오르며 세계 수준의 명품 야구를 선보였던 한국이 올림픽에서 예상을 뒤엎고 금메달을 차지했고 한국야구위원회(KBO)는 결승전이 열렸던 8월 23일을 '야구의 날'로 지정했다. 당시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던 김경문 감독은 명장의 반열에 올랐고 이승엽, 류현진 등은 금메달의 주역으로 대서특필됐다.

두꺼운 선수층과 자국 프로야구의 열기와 높은 수준에도 한국의 벽을 넘지 못한 일본은 한국 야구에 대해 부러운 시선을 보냈다. 일본은 올림픽 야구에서 은메달(1996년 애틀랜타) 한 차례와 동메달(1992년 바르셀로나, 2004년 아테네)을 두 차례 땄을 뿐 금메달은 획득하지 못했다.

한국과 결승전을 치른 쿠바도 한국 야구를 칭찬했다. 야구광으로 쿠바 야구의 최대 후원자였던 피델 카스트로는 당시 쿠바 공산당 기관지 '그란마'를 통해 "한국 프로 선수들은 타격을 하기 위해 설계된 기계 같았고 류현진은 다양한 구속의 공을 정교하게 던졌다"며 "한국은 훌륭한 팀이었다"고 추켜세우기도 했다.

2008년은 한국 야구 산업면에서도 중요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그 해부터 한국 프로야구는 전 경기 중계가 실시됐다. 그 전까지 인기 구단의 경기가 중복 중계되는 경우가 있었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방송사들은 서로 다른 경기를 생중계했고 경기가 끝나자마자 하이라이트 분석 프로그램을 통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자연스럽게 야구와 관련된 화젯거리가 널리 확산될 수 있었다. 여기에 포털 사이트를 통해 프로야구 전 경기가 중계되면서 야구 팬들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프로야구를 즐길 수 있게 됐다.

한때 아재들의 놀이터였던 프로야구 경기장에서도 변화가 생겨났다. 경기장마다 젊은 팬들이 많이 모여들면서 응원문화가 바뀌기 시작했고 프로야구는 한 시즌 800만 명의 관중과 함께하는 '국민 스포츠'로 발전할 수 있었다. 여기에 오랜 기간 숙원사업이었던 돔구장도 건설됐으며 프로야구단의 숫자도 10개로 불어났다.

김경문 감독(오른쪽 3번째) 등 한국 야구 대표팀 코칭스태프가 지난 4일 도쿄올림픽 일본과 준결승전을 지켜보고 있다. /사진=뉴시스 김경문 감독(오른쪽 3번째) 등 한국 야구 대표팀 코칭스태프가 지난 4일 도쿄올림픽 일본과 준결승전을 지켜보고 있다. /사진=뉴시스
베이징 올림픽으로부터 13년이 지난 2020 도쿄 올림픽에서 야구가 다시 정식종목으로 부활한 이유는 개최국 일본의 요청 때문이었다. 개최국이 특정 종목의 경기를 신청해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승인할 수 있다는 규정에 따라 2016년 야구가 다시 정식종목이 될 수 있었다.

야구가 다시 올림픽 정식종목이 된 뒤 한국 야구는 준비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다. 지난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이 끝난 뒤 야구 대표팀을 이끌던 선동열 감독이 사퇴했다. 아시안게임 대표팀을 둘러싼 특혜 선발 논란 때문이었다.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면 병역특례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배려해 실력이 모자란 병역 미필자 선수를 뽑은 것 아니냐는 게 논란의 핵심이었다.

대표팀 감독의 고유 권한인 선수 선발과 관련해 국정감사에 출석해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선 감독은 "선수 선발과정에서 어떤 청탁이나 불법 행위는 없었다"면서도 "병역 특례에 대한 시대적 비판에 둔감했다"며 고개를 숙여야 했다.

한국 야구 역사상 최초의 대표팀 전임 감독으로 도쿄 올림픽까지 대표팀을 이끌 것으로 보였던 선동열 감독은 "감독은 무한책임을 져야 하지만 선수 선발과 경기 운영에 대한 권한은 독립적이고 존중받아야 한다"며 "스포츠가 정치적 소비의 대상이 되어 무분별하게 증인으로 소환되는 사례는 제가 마지막이기를 간절히 희망한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야 했다.

선 감독의 뒤를 이어 베이징 금메달의 주인공 김경문 감독이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지만 도쿄 올림픽 직전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터진 프로야구 선수들의 술자리 파문으로 야구 대표팀에 대한 시선은 매우 악화됐다. 두 명의 대표팀 선수가 이 사건에 연루돼 선수를 급하게 교체해야 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지난 5일 한국은 미국과 경기에서 2-7로 패해 7일 도미니카공화국과 동메달 결정전을 치른다. 4일 펼쳐진 일본전과 5일 미국전에서 한국 야구는 상대 팀과 실력 차가 확연히 드러났다. 세계 수준의 명품 야구를 했던 한국 야구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다.

도쿄 올림픽에 출전한 야구 대표팀은 선동열 전 감독의 퇴진부터 술자리 파문까지 여러 가지 악재로 삐걱거렸고 과거 국가대표팀에 비해 약체라는 평가를 받은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도미니카공화국과의 동메달 결정전에서 한국 야구의 올림픽 드라마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줬으면 한다. 올림픽 무대는 한국 야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한 원동력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야구의 올림픽 신화가 마치 베이징 올림픽 우커송 야구장처럼 사라지기를 원하는 야구 팬은 없다. 더욱이 2024년 파리 올림픽에서는 야구가 다시 정식종목에서 사라져 한국이 명예회복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른다.

이종성 교수. 이종성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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