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한계를 넘으려 했던 배우 강수연을 추모하며

[전형화의 비하인드 연예스토리]

전형화 기자  |  2022.05.09 10:31
강수연이 세상을 떠났다. 대한민국 연예인 중 처음으로 월드스타라는 수식어가 붙었고, 그 수식어가 결코 부끄럽지 않은 배우였다.


한국에서 배우의 길을, 특히 여배우의 길을 가기란 쉽지 않다. 젊어서는 청춘스타를 연기하고, 나이가 차면 차는대로 근사한 역할이 준비되는 남자배우들과 달리 여배우가 갈 수 있는 길이란 많지 않았다. 여배우가 맡을 수 있는 역할은 한정적이었다. 젊어서는 남자주인공의 연인이고, 나이 들어서는 남자배우의 아내이고, 더 들어서는 남자배우의 어머니가 대부분이었던 시절이 불과 얼마 전이었다. 젊은 여배우에게 주어졌던 역할들도 사랑의 대상, 하녀, 창녀, 비구니나 수녀 같은 성직자, 한을 품은 귀신, 과부 등이 대부분이었던 시절이었다.

이제는 점차 달라지고 있지만, 한 때 여배우는 결혼과 동시에 은퇴라는 불문율이 있었다. 스캔들이 나면 당사자와 결혼을 해야 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유독 여배우에게 더 혹독한 여론 탓이었다.

강수연은 그런 시절을, 그런 시절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걸었다. 한국영화가 방화라 불리던 시절. 강수연은 청춘물과 문예주의 작품을 오갔으며, 시대 상황이 담긴 영화들에 출연해왔다. '고래사냥2'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 '씨받이' '아제아제 바라아제'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 '그대 안의 블루' '경마장 가는 길'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처녀들의 저녁식사' 등등. 80, 90년대를 대표하는 작품들 속에 강수연이 있었다.

강수연은 시대가 그녀에게 허용한 작품들 속에서 확고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렇게 확보한 존재감은 해외 수상 소식까지 더해져 강수연 만의 아우라를 만들어냈다. 서구 영화계 인사들이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잘 모르던 시절, 강수연이 한국 배우 최초로 베니스국제영화제와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는 건 상징하는 바가 어마어마했다.

강수연은 강수연이란 상징 자본을 적극 활용해 9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절에 일조했다. 강수연이 아니었으면 제작에 들어가지 못했을 영화들이 많았다.강수연은 80년대 에로티시즘 영화들이 창궐할 때는 삭발을 하며 '아제아제 바라아제' 등으로 다른 길을 가려했고, 90년대에는 '처녀들의 저녁식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등 한국 페미니즘 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들을 함께 했다.

비록 새롭게 바뀌어가는 시대에 새로운 물결에 밀려나긴 했지만, 강수연은 그 시절 태동하기 시작한 한국의 각종 영화제와 시네마테크 설립에 일조했다. 2000년대 초반 SBS 드라마 '여인천하'로 그녀의 존재감을 다시 드러낸 건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여인천하'는 강수연의 복귀 그 이상이었다. 특유의 비음 섞인 대사톤과 80년대를 거치며 굳어져갔던 그녀의 연기가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돼 대중에게 "난정아~"로 각인됐기 때문이다.

이후 '주리' 등 독립영화에 출연한 강수연은, 그녀의 과거 연기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그건 천상 여배우였던 강수연이 도달한 연기의 어떤 지점들이 드러났던 찰나들이기도 했다.

강수연의 유작이 돼버린 넷플릭스 SF영화 '정이'는 출발이 쉽지는 않았다. '정이'는 기후변화로 인해 인류가 지구에서 살기 힘들어진 22세기를 배경으로 피난처인 쉘터에서 벌어지는 내전을 그린다. 강수연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최정예 용사인 정이의 뇌를 복제해 인간형 전투로봇으로 만들려는 연구소 팀장 역할을 맡았다.

200억원이 투입되는 영화에 강수연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는 게 쉬운 결정은 결코 아니다. 투자 받기도 쉽지 않은 건 당연지사다. 연상호 감독은 그럼에도 그 역할에 강수연 밖에 없다는 확신으로 삼고초려를 했다. '정이'가 넷플릭스영화가 된 배경이기도 하다. 강수연은 그간 해왔던 배역과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작품이라 고민은 했지만 연상호 감독에 대한 신뢰와 시나리오에 대한 만족으로 '정이' 출연을 결심했다는 후문이다.

지난 1월 모든 촬영을 마치고 후시 녹음까지 마쳤기에 '정이'는 배우 강수연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컸다.

한 때 시대가 여배우들에게 허용한 역할들 속에서도 확고한 존재감을 드러냈던 강수연이, 이제는 남자배우들에게만 허용됐던 역할들을 어떻게 소화하며 어떤 존재감을 드러냈을 지 기대가 컸다. '정이' 뒤로 이어갔을 배우 강수연의 길에 대한 기대가 컸다.

아쉽다. 안타깝다. 하늘이 허용한 시간이 야속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전형화 기자 aoi@mtstar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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