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감독, 추모가 아닌 기억해야 하는 이유

[전형화의 비하인드 연예스토리]

전형화 기자  |  2020.12.15 10:44


영욕의 세월이었다. 김기덕 감독이 먼 이국인 라트비아에서 코로나19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60번째 생일을 불과 일주일 앞두고 맞은 쓸쓸한 죽음이다. 그가 연락이 두절돼 지인들이 찾아 헤맨 끝에 병원에서 사망한 사실을 뒤늦게 확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가족과 지인도 곁에 없는 죽음이었다.

김기덕 감독의 죽음을 놓고 영화계에선 여러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누구는 소식을 접하자 "한국영화계의 큰 손실"이라고 추모했고, 누구는 "논란이 있는 만큼 추모해서는 안된다"고 질타했다. 어디는 "문재인의 국민으로 살고 싶다"던 그의 과거 발언을 전면에 내세우기도 했다. 씁쓸한 풍경이다.

김기덕 감독과 인연은 길지만 깊지는 않았다. 2019년 2월, 그에게서 1억원의 손배소를 당했으니 악연에 더 가깝다. 그럼에도, 김기덕 감독의 작품 상당수와 그가 영화를 만드는 태도, 그리고 그의 삶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아주 많지만, 그럼에도 고인은 기억해야 할만한 순간들을 갖고 있다.

추모가 아닌 기억해야 하는 까닭은, 김기덕 감독이 추구한 개인적인 순간들이 한국영화사의 어떤 순간들과 겹쳐지기 때문이다. 그의 사익이, 한국영화사의 공익과 부합된 어떤 순간들은, 잊혀져선 안되는 까닭이다. 그건 김기덕 감독이 세계 3대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는, 한때 해외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던 영화감독이라서가 아니다.

김기덕 감독은 한국영화계에서 주류가 아니었다. 그의 명성으로 간과돼 왔지만 김기덕 감독은 한국영화계에서 이단아였다. 그렇기에 그는 한국영화계 주류와 늘 싸워왔다. 해외에서 더 인정받았다. 그렇기에 해외에서 더 인정받으려 했다.

2004년, 김기덕 감독은 베니스국제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인 '빈 집'이 영진위에서 선정하는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출품 한국영화에 선정됐다가 반복되는 해프닝을 겪었다. 영진위는 당시 '빈 집'을 추천한다고 발표했다가 기준에 맞지 않는다며 취소하고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를 선정해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김기덕 감독이 격렬하게 항의해 영진위가 아카데미 집행위원회에 거푸 자격 요건을 질의하는 촌극도 벌어졌다. 이후 영진위는 '빈 집'에 이듬해 후보 출품 자격을 주는 것으로 사건을 일단락 시켰지만 2005년에는 박광현 감독의 '웰컴 투 동막골'에게 밀렸다. 그가 해외로 계속 눈을 돌린 이유였기도 하다.

2006년, 김기덕 감독은 스크린독과점 문제를 공론화했다. 그는 '시간'을 내놨고, 마침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흥행몰이를 하고 있었다. 김기덕 감독은 MBC '100분 토론'에 출연해 "(괴물이)좋은 영화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왕의 남자'는 200개 스크린으로 시작했지만 1000만명이 넘었는데 '괴물'은 3배인 600개 스크린에서 상영됐다는 점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괴물'이 600개 스크린에서 상영된 게 스크린 독과점의 시작이었고, 그 뒤 블록버스터들이 1000개 스크린을 넘어 '어벤져스4'가 2800개 이상 스크린에서 상영된 것을 돌이켜보면, 김기덕 감독의 문제 제기는 분명 사익의 추구였지만 공적인 담론의 출발이었다.

2013년에는 문제의 영화 '뫼비우스'로 제한상영가 논란을 일으켰다. '뫼비우스'가 두 차례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자 그는 영진위에서 찬반 상영회를 가졌다. 한국에는 제한상영가 전용극장이 없기에 제한상영가 판정은 사실상 상영금지를 뜻한다. 당시 찬반 상영회에선 그를 응원하는 영화인들이 대거 몰려 부부젤라를 불기도 했다. '뫼비우스'와 김기덕 감독을 응원했다기보다는 제한상영가라는 등급에 대한 항의였다. 표현의 자유는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공론화였다.

사실 김기덕 감독은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잠행을 택하곤 했다. 그는 '비몽' 이후 불화가 불거지자 '아리랑'으로 칸국제영화제로 복귀할 때까지 4년 동안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복귀 이후 '피에타'로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는 등 화려한 나날을 보내다가 여배우 폭행 문제가 불거지자 다시 외부 공식나들이를 자제했다. 그랬다가 '인간, 공간, 시간, 그리고 인간'이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되면서 다시 공식석상에 모습을 내비쳤다. MBC 'PD수첩'으로 미투 논란이 불거지자 고소를 위해 모습을 드러낸 것 외에는 또 잠행을 택했다. 이후 모스크바국제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는 것을 비롯해 카자흐스탄에서 영화를 찍는 등 해외로 활동 영역을 바꿨다. 삶을 마감한 라트비아도 그가 영주할 목적으로 집을 구매하려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예술가와 작품을 분리해서 평가하는 건, 불가능하다. 분리가 가능하다고 믿는 건, 작품이 시간의 풍화를 견뎠기 때문이다. 김기덕 감독과 그의 작품, 그리고 그의 삶을 분리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의 작품이 시간의 풍화를 견딜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김기덕 감독은 기억되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의 삶과 어떤 순간들은, 한국영화사의 영욕이며, 반면교사며, 한 시대였다.

삼가 고인을 기억한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스타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스타뉴스 단독

HOT ISSUE

스타 인터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