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척척박사] 5. 침수로 부부의 연 끊긴 '중종'

전시윤 기자  |  2022.09.01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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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초 최악의 폭우로 강남일대가 쑥대밭이 되었다. 1907년 관측 이래 115년 만에 처음이다.

사망자는 물론이고 집과 차량 등이 침수되고 각종 도로 등이 파괴되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강남 일대의 잦은 침수는 조선시대에도 흔했던 일이다.

선릉역으로 잘 알려진 강남 역삼동에는 조선의 제9대 왕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를 모신 선릉과 성종의 둘째 아들 중종이 묻힌 정릉이 있다. 부자지간의 두 능을 합쳐 선정릉으로 부르지만, 그 내력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조선의 왕릉은 부부와 함께 묻히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중종은 3명의 왕비와 7명의 후궁을 두었음에도 왕과 왕비 셋 모두가 각기 따로 '나 홀로' 묻혔다. 중종이 쓸쓸히 홀로 묻힌 결정적인 이유는 믿을수 없겠지만 잦은 침수 때문이었다.

중종은 신하들이 임금(연산군)을 강제로 끌어내린 조선시대 최초의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다.

성희안은 연산군의 폭정과 방탕을 간언했다가 졸지에 판서에서 종9품 말단직으로 밀려났다. 앙심을 품은 성희안은 1506년(연산 12년) 9월, 연산군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좌승지, 동부승지를 거쳤으나 임금의 미움을 사 파직당한 박원종, 영의정 유순정 등과 반정을 모의했다.

박원종은 임금(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진성대군(중종)을 옹립하기 위해 우의정 강구손을 통해 비밀리에 연산군의 매부요 중종의 장인 신수근의 마음을 떠보았다. "좌상은 대감 누이와 딸 중 누구를 더 중히 여기십니까." 신수근은 "임금은 비록 포악하나 세자가 총명하니 그를 믿고 살뿐입니다."라며 넌즈시 딸 편이 아닌 누이 편에 서 임금을 폐하고 사위 진성대군을 세우는 일을 반대했다.

반정세력은 1506년(연산군 12년) 9월 1일 먼저 무사들을 훈련원에 모은 후 진성대군에게 거사를 알리고 궁금세력(宮禁勢力)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신수근, 신수영 형제와 임사홍 등 연산군의 최측근을 죽인 후 궁궐을 에워싸고 반정을 시도했다.

거사에 성공한 성희안 등은 성종의 계비이며 중종의 친어머니 대비를 찾아가 연산군을 폐하고 강화도 교동에 안치시켜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그리고 이튿날인 9월 2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진성대군을 왕위에 추대 하였으니, 이가 바로 조선조 11대 왕 중종이다.

하지만 왕비 단경왕후는 책봉 7일 만에 반정 주체세력에 의해 꽃도 피워 보지 못하고 폐위되었다. 단지 그 이유가 죄인 신수근의 딸이기 때문에 왕비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중종은 "조강지처를 어찌 내친단 말인가."라며 거절했지만, 공신들의 압력에 쫓겨난 단경왕후는 할아버지 신승선의 집에 머물다가 1557년(명종 12년) 12월 7일, 71세로 후사 없이 승하했다. 양주 거창 신씨 문중 묘역에 안장되었다가 1739(영조 15)에 복위되어 능호를 온릉이라 했다.

중종은 단경왕후 신씨가 폐위된 이듬해 1507년 영돈령부사 윤여필의 딸 장경왕후를 둘째 왕비로 맞아드렸다. 하지만 장경왕후는 원자(인종)를 낳은 후 7일 만에 산후병으로 1515년 3월 초 새벽 4시, 25세로 경복궁 동궁 별전에서 별세했다. 원자를 출산해 만백성의 축하를 받은 지 불과 일주일도 안 돼, 왕비가 세상을 뜨자, 중종은 "나는 무던한 아내를 일찍 잃고 심란하기가 그지없어 머리를 들 수가 없다며 긴급하지 않는 공무는 보고하지 말리."는 지시까지 내렸다. 왕비의 시호를 온순하고 외모가 단정하다고 '章'이라 하고, 밤낮으로 조심한다고 '敬'이라 하여, '장경'이라 정하고 능호를 '희릉'(禧陵)이라 했다.

왕후에 대한 중종의 애정은 각별했다. 왕비의 병이 깊어지자 중종은 친히 병문안을 가 할 말이 없는가 묻자, 왕후는 "입은 은혜가 너무 커서 무엇이라 더 말 할 수 없습니다."라며 눈물만 흘리었다. 왕비는 평소에도 "저도 옛 서적을 읽었습니다. 비록 어진 태사(주나라 문왕의 부인)의 덕을 따라가지는 못하겠지만, 임금에게 순종하지 않았다는 이름을 듣고 싶지 않은 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제가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허물을 고칠 수 있도록 기탄없이 깨우쳐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왕비는 책봉 된지 9년 동안 임금에게 한 번도 벼슬을 시켜 달래거나 죄를 벗겨달라고 청한 적이 없어, 중종은 감탄하여 "왕비는 무던하고 지조가 높고, 태사의 덕이 이보다 더할 수는 없다"라며 끔찍이 대하였다.

왕과 왕비는 원래 5개월 장을 치러야 하나, 장경왕후는 돌아가신지 불과 두 달 만인 1515년 4월 4일 속전속결로 태종의 헌릉 옆 능선에 안장했다. 그 이유가 장사를 치러야할 7월은 윤달이라 안 되고, 5월은 좋은 날이 없고, 또 장지로 가려면 많은 나루를 건너야 하는데 6월은 장마철로 물이 불어 강을 건너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당시 왕비의 관을 실은 큰 상여는 배 500척으로 부교를 설치해 한강을 건넜다.

하지만 헌릉 옆에 있던 장경왕후의 희릉은 22년 후 정적을 치기위한 김안로의 계략으로 1537년(중종 32)년 9월 지금의 고양시 서삼릉으로 이장되었다. 풍수지리적으로 돌이 광중 밑에 깔리면 불길한데도 이를 파내지 않고 그대로 묻었다는 것이 이유다.

산후병으로 장경왕후가 요절하자 중종은 윤임의 9촌 조카딸 문정왕후 윤씨를 세 번째 왕비로 맞아들였다. 19살에 왕위에 오른 중종이 1544년 11월 15일 창경궁에서 재위 39년, 보령 57세로 승하하자, 이듬 해 2월 서삼릉 내 둘째 왕비 장경왕후의 희릉 오른쪽 능선에 안장했다. 능을 동원이강릉으로 조영하고 정자각을 왕과 왕비의 능 사이로 옮기고 능호를 희릉이라 했다. 한 달 뒤 왕비의 문패 아래 왕이 있을 수 없다하여 능호를 희릉에서 정릉으로 바꿨다.

장경왕후의 아들 인종이 왕위에 오른 지 8개월 만에 죽자, 문정왕후는 자신의 소생을 왕(명종)으로 즉위시키고 동생 윤원형을 권력 핵심으로 내세워 무소불위 권력을 휘둘렀다. 강남 봉은사 주지 보우와 짜고 중종을 장사 지낸지 7년 만인 1562년 9월, 서삼릉에 멀쩡히 잘 있는 중종의 정릉을 지금의 강남 선릉 옆으로 옮겼다. 겉으로 들어난 천장의 이유가 고작 능지가 풍수지리적으로 불길한 땅이라 선왕을 모실 수 없다는 것이다.

실은 남편 중종이 둘째 부인 장경왕후와 함께 있는 것을 시기해 사후 자신이 남편과 함께 묻히고자 한 것이다.

막상 중종의 정릉을 서삼릉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보니 지대가 낮아 여름철에는 재실 까지 강물이 들어 아무리 흙을 파다 부어도 소용이 없었다. '선조실록'은 "정자각 앞이 지세가 낮아 장마가 질 때마다 강물이 불어 홍살문까지 잠겨 배를 타고 다녔다."고 했다.

1565년(명종 20) 4월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중종 옆 정릉에 안장하려 했지만, 잦은 침수로 결국 남편과 함께 묻히지 못하고 멀리 떨어진 지금의 태릉에 홀로 묻혔다. 문패의 이름도 지아비 중종의 정릉이 아닌 태릉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중종의 정릉은 성종의 선릉과 함께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8) 4월 13일 왜군에 의해 파헤쳐지고 왕의 시신은 불태워지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이일로 정릉을 다시 서삼릉 내 둘째 부인 장경왕후의 희릉 곁으로 이장하자는 주장이 있었지만 결국 실행되지 못했다.

중종의 정릉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나라 일은 처음에 잘못된 결정을 하면 바로잡기가 어려우며 이로 인해 다양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뒤늦게라도 잘못을 잡기 위해서는 그 분야에 정통한 전문가가 나서야 해결 방법도 찾아 낼 수 있다.

-정종수 CST 부설 문화행정연구소(ICST) 선임연구위원

문화체육 전문 행정사 법인 CST는

문화예술, 콘텐츠, 저작권, 체육, 관광, 종교, 문화재 관련 정부기관, 산하단체의 지원이나 협력이 필요 한 전반 사항에 대해서 문서와 절차 등에 관한 행정관련 기술적인 지원을 포괄적으로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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