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 박종철과 이한열에게 바치는 뜨거운 헌사①

[리뷰] 1987

전형화 기자  |  2017.12.15 08:00


"호헌철폐, 독재타도"

'1987'은 이 말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모두가 이 말을 위해 싸웠던 사람들에게 빚졌다는 걸 전하는 영화다. 여전히 그 말은 유효하며, 그 말을 위해 싸울 수 있다고 전하는 영화다.

1987년 1월. 경찰 조사를 받던 스물 두 살의 대학생 박종철이 죽었다. 경찰은 증거인멸을 위해 대공수사처 박처장(김윤석)의 주도로 시신을 급하게 화장하려 한다. 사망 당일 당직이었던 최검사(하정우)는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경찰 공안의 요구를 거부한다. 원칙대로 부검을 밀어붙인다. 청와대와 경찰, 검찰, 안기부 등 사방에서 압력을 가하지만 원칙대로 하고자 한다. 그러면서 후배 검사를 통해 기자에게 이 같은 사실을 흘린다.

경찰은 어떻게든 사건을 무마하려 한다. 조사를 받던 대학생이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한다. 대학생 사망을 확인한 의사와 부검을 했던 의사도 입을 닫고 있으라는 겁박을 받는다. 하지만 끈질기게 이를 캐던 윤기자(이희준)가 물고문 중 질식사라는 증언들을 확보하고 보도한다.

박처장은 조반장(박희순) 등 형사 둘만 구속시키며 사건을 축소하려 한다. 그러면서 박처장은 더 큰 공안 사건을 만들어 정국을 바꾸려 한다.

대학가와 재야, 종교계 등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 노력한다. 마침 교도소에 수감된 조반장을 통해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 교도관 한병용(유해진)은 이 사실을 수배 중인 재야인사에게 전달하기 위해 조카인 연희(김태리)에게 위험한 부탁을 한다. 점점 위험은 커지고, 진실을 알리려는 사람들은 위기에 처한다.

한 청년이 죽었다. 어떻게든 입을 막으려고 하는 사람들, 어떻게든 세상에 알리려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다고 세상이 바뀔 리 있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1987'은 한 청년의 죽음으로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고, 그 바뀜을 위해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노력했는지를 전하는 이야기다. 1987년 군부독재를 끝내고 직선제 개헌을 위해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던 사람들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뜨겁다. 뜨거워질 수 밖에 없는 이야기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으니 정해진 수순으로 치닫는다. 장준환 감독은 이 유명한 실화를, 그러나 잊혀져 가고 있는 실화를,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영화로 만들어 지금에 전하려 했다.

'1987'은 크게 세 가지 단락으로 꾸려졌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자 은폐하려는 경찰과 부검을 강행했던 검사, 그리고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리려 했던 기자들의 이야기가 한 단락이다. 꾸미기 좋아하고 데모 같은 거 해봤자 돌아오는 건 가족들의 상처뿐이라는 대학생 연희가 잘생긴 데모하는 오빠를 만나면서 어떻게 변화하게 되는지를 그리는 게 한 단락이다. 두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지면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고 또 다른 대학생 이한열이 세상을 떠나고 마침내 6월 항쟁의 불길이 타오르는 게 마지막 단락이다.

장준환 감독은 이 세 단락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한편 특정한 주인공이 없는 영화를 끝까지 몰입하게 만들도록 하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썼다. 세 단락을 하나는 스릴러, 하나는 멜로, 하나는 전형적인 실화 소재 영화의 결말로 구성했다. 한편으론 김윤석이 맡은 박처장이란 확실한 안타고니스트를 만들어 영화 전체에 긴장감을 주도록 했다. 이 시도는 적합했다.

장준환 감독은 '1987'에 특정한 주인공을 앞세우지 않았다. 고 박종철 열사를 비롯해 사건을 세상에 알리려 노력했던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분연히 일어난 모든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이런 선택은 위험하다. 의도는 선해도 자칫 이야기가 구심점을 잃을 수 있다. 장준환 감독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역으로 군부독재를 상징하는 절대악을 만들었다. 악이 강하면 강할수록, 어둠이 짙으면 짙을수록, 빛의 소중함과 온기를 강하게 바라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1987'은 김윤석으로 상징되는 절대악과 그에 맞서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김윤석은 단연 최고다. 빨갱이에게서 나라를 지킨다는 신념으로 똘똘 뭉친 박처장을 그대로 육화했다. 그의 눈빛, 그의 목소리, 그의 발걸음이 '1987'에 짙게 드린 공포 그 자체다. 타오르는 얼음. 그 자체다.

김윤석이 '1987'에 공포라면, 김태리는 '1987'에 한줄기 빛이다. 때로는 사랑스럽게, 때로는 강인하게, 때로는 처절하게, '1987'에 온기를 더한다. 김태리를 각성시키는 잘생긴 데모하는 오빠 역의 강동원은, '1987'에 숨 쉴 틈을 주고 각성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강동원은 강동원으로서 기능했다.

'1987'에는 다양한 군상들이 등장한다. 누구는 정의롭게, 누구는 비겁하게, 누구는 작은 권력에 취해, 누구는 외면하며 각각의 몫을 다한다. 다분히 전형적이고 도식적일 수 있는 각각의 인물들이 하나하나 그 시대 속 사람들로 스크린에 되살아난 건 작은 역이라도 참여하겠다고 모여든 배우들 하나하나의 공이다. 이 얼굴들을 클로즈업으로, 핸드헬드로, 부감으로, 하나씩 조명한 장준환 감독의 공이다.

'화이'에서 과할 정도로 카메라를 쪼개고 붙이고 넓혔던 장준환 감독은 '1987'에선 적확하게 카메라를 사용했다. 깊고 넓고 위에서 아래로, 있어야 할 위치에서 강조해야 할 방향으로, 붓 쓰듯이 유려하게 활용했다. 장준환 감독의 재능이 비로소 만개한 듯 하다. 다만 박종철 고문 장면과 이한열 최루탄 장면의 직접적인 묘사는,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상업적인 활용이란 지적은 피할 수 없을 듯 하다.

'1987'은 박종철 열사로 시작해서 이한열 열사로 끝을 맺는다. 한 사람의 죽음이 세상을 움직이기 시작했고, 다른 죽음이 세상을 바꿨다고 말한다. 그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두 사람의 죽음이 광장으로 사람들을 모았고 시대의 분기점이 됐다고 말한다. 그 광장은 오늘의 촛불과 맞닿아있다고 전한다. 과거를 다룬 '1987'이 오늘을 이야기하는 건 그 때문이다.

한편으론 씁쓸하다. 1987년 6월부터 30년이 흘러 그 때 진실을 말하려 애썼던 누군가와 진실을 덮으려 했던 누군가와 광장을 가득 메운 누군가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12월27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추신. 비중과는 상관없이 고 박종철, 고 이한열 열사 역을 맡은 배우들의 이름부터 엔딩 크레딧에 올라간다. '1987'이 두 열사에게 바치는 헌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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